1948.8.15 미군정종식과 <대한민국>출범이 선언됐고 조선경비대를 편입시켜 9.5 <대한민국국군>을 발족했다. 제주민중항쟁은 4.3무장항쟁으로 전화된뒤 미군정청의 초토화작전에도 불구하고 수습되지않았다. 미군정은 철군을 뒤로 미뤘다. 9.10 정당사회단체들은 <제주4.3사건>에 대해 <담화문>을 발표해 <파견경찰대를즉시철회하고원만히평화리에해결할것>을 촉구했다. 1947.3 <트루먼독트린>에서 밝힌 <냉전>정책의 연장선에서 이승만정부는 통일독립정부수립을 요구하는 세력에 대한 파쇼폭압적인 토벌을 선택했다. 1948.10.11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고 본격적인 토벌초토화에 돌입했다. 한라산입산금지령이 내려졌다. 1948.10.19 밤9시 전남 여수시에 주둔하고있던 국군14연대가 제주진압명령을 거부했다. 이들은 <애국인민에게호소함>을 발표했다. 호소문에서는 <우리들은조선인민의아들노동자,농민의아들이다.우리는우리들의사명이국토를방위하고인민의권리와복리를위해서생명을바쳐야한다는것을잘안다.우리는제주도애국인민을무차별학살하기위하여우리들을출동시키려는작전에조선사람의아들로서조선동포를학살하는것을거부하고조선인민의복지를위하여총궐기하였다.1.동족상잔결사반대2.미군즉시철퇴>라고 밝혔다. 10.20 새벽 봉기군은 여수경찰서를 접수하고 오전9시에는 순천역에 도착해 순천에 파견돼있던 여수14연대 2개중대와 함께 순천읍내를 점령했다. 이날 오후에는 여수인민대회가 진행됐는데 1000~2000명이 운집했다. 대회참가자들대다수는 여수가 진압된후 즉결처형됐다. 10.21 미군사고문단의 지휘와 미군의 최신군사장비들의 지원을 받는 <반군>토벌전투사령부가 조직됐다. 10.22 여수·순천지역에 계엄령이 발포됐다. 여수<반란>의 총지휘자, 총사령관으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자 여수여중교장인 송욱이 지명되면서 군<반란>사건이 민중·학생<반란>사건으로 바뀌었고 민간인과 학생들까지 학살대상이 됐다. 10.26 토벌군이 여수시내 주요거점을 장악했고 10.27 여수시내를 완전 진압했다. 11.1 전라도전역으로 계엄령이 확대됐다. 외신은 이승만정부가 <안전과독립을요구하는대한정부의시금석이될것>이며 유엔에서의 <코리아문제>토의결정에 영향을 주게 될것이라고 논평했다. 11.5 군기자회견에서는 미군의 배후지휘를 애써 부정하며 <순전히국군의독자적작전>이라는것을 강조했다. 11.9 이승만정부는 여순사건을 빌미로 <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상정했다. 12.1 <국가보안법>이 공포됐으며 이후1년간 18만8121명이 체포됐다. 1948.12.12 유엔은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유일합법정부로 승인했다. 1949.4.9 여수14연대봉기지휘관 김지회중위가 사살돼 시신은 효수됐다. 미국방부는 하우스만에게 <효율적이고신속한여순반란진압작전의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수여했다. 이시기 군작전권을 쥔 미군과 이승만정부의 명령은 그 반민중적인 폭압성으로 인해 군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8.6 제주초토화작전을 주도하며 딘미군정장관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대령을 죽이고 22세의 나이로 1948.9 사형당한 문상길중위는 <매국노의단독정부아래서미국의지휘하에한국민족을학살하는한국군대가되지말라는것이저의마지막염원>이라고 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