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 항쟁의기관차〉 사회주의진영내 수정주의책동과 자주·자립·자위

1953 소련에서 스탈린이 서거하고 흐루시쵸프가 음모적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했다. 1956.2 소련공산당20차대회에서 <평화적공존>·<평화적이행>을 주장하고 <스탈린격하>책동이 시작됐다. 이후 소련공산당에 대한 공산당·노동당들의 비판이 일었고 이는 소중분쟁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전후복구건설을 다그치고 뒤이어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공업화가 제기됐다. 1955.12~1956.1 조선에서는 <사상사업에서주체를세우기위한사상전>이 전개됐다. 자주·자립·자위의 3대노선은 김일성주석의 1965.4.14 인도네시아 알리아르함사회과학원에서 한 강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사회주의건설과남조선혁명에대하여>에서 처음 제시됐다고 알려졌는데 조선은 역사적으로 1955.12 <사상사업에서교조주의와형식주의를퇴치하고주체를확립할데대하여>에서 시작된 사상전을 계기로 사상분야에서 주체확립을 앞세우면서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을 철저히 세워갔다고 평가하고있다. 정치에서의 자주는 대국주의·수정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하는 사대주의적경향을 극복하고 나라의 실정과 인민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노선과 정책을 수립하고 자체의 힘으로 철저히 관철해나가도록 하는것이다. 경제에서의 자립은 당시 수정주의자들이 <통합경제>노선을 주창하면서 세브(코메콘)에 들어갈것을 강요하는것을 반대하고 자립적민족경제건설노선을 철저히 관철해나갈것을 요구했다. 국방에서의 자위의 원칙하에 바르바샤조약기구가 흐루시쵸프수정주의의 대두로 사회주의나라들을 군사적으로 예속시키는 도구로 전락된것을 반대하며 자체의 국방력을 계속 강화해 나라와 인민의 자주권을 지켜나가도록 하는것이다. 1956.4 조선노동당3차대회에서 전후복구건설을 일단락짓고 사회주의혁명과업을 제기했다. 3차당대회는 소련공산당20차대회이후 국제공산주의운동내에서 처음으로 열렸는데, 소련공산당은 여기서 <평화적공존>과 <개인미신>문제를 토의할것을 강요했다. 이에 조선노동당은 단호히 반대했고 후에 당대회는 주체적입장으로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김일성주석은 대회이후인 1956.6~7 소련과 동유럽의 여러나라들과 몽골을 순방하며 사회주의나라들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흐루시쵸프수정주의의 영향아래 사회주의나라들에서 반정부책동이 벌어지면서 1956.6 폴란드에서 포즈난시위, 1956.10 헝가리에서는 반정부시위가 일어났다. 1957.11, 1960.11 사회주의나라들의 공산당·노동당대표들의 회의가 열렸다. 1957.11 회의에서 김일성주석은 <평화적공존>의 시대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투쟁의 시대, 혁명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그에 기초해 반제투쟁의 기치를 들고 제국주의 특히 미제를 반대하는 원칙적입장과 광범한 반제역량을 동원해 반미투쟁을 결정적으로 강화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전쟁의 근원은 제국주의에 있는만큼 평화는 침략과 전쟁정책을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쟁취할것을 주장했다. 또 민족해방운동에서는 무장투쟁을 결정적형태로 보고 적극적인 투쟁을 벌이며 공산당·노동당들이 이투쟁을 지지성원하는것이 숭고한 의무로 된다고 밝혔다. 조선은 1960.11 회의에서 수정주의자들이 내놓은 초안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됐으며 이에 따라 1957선언정신에 기초해 기본적으로 혁명적내용의 회의성명이 채택됐다고 밝히고있다. 조선은 자주적인 대외활동으로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국제공산주의운동과 전반적세계혁명을 전진시켜나갔다고 평가하고있다. 조선은 국제공동주의운동에서 자주노선을 취하며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은 1961.7 소련·중국과 연이어 유사시 자동개입의 내용이 포함된 우호협조및호상원조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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