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 항쟁의기관차〉 할힌골전투에서의 패배

일본은 중일전쟁을 속전속결로 결속지으려했으나 1938 중국인들이 강력히 저항하며 전쟁은 고착화돼갔다. 1938말 일본은 중국의 해안주요도시들을 거의 장악했으나 안정적이지못했다. 도시의 내부는 불안정했고 점령지역에서의 유격대들의 활동은 나날이 격화돼갔다. 일제는 3개월안에 중국을 강점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24개사단의 60만대군을 투입하고 2년만의 신속한 승리를 노렸으나 이는 좌절됐다. 전쟁의 장기화, 일본자체의 인적, 물적 예비의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히자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발동해 파쇼전시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장개석은 항일전쟁에는 소극적이었던 반면 <반공>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북부중국에는 70만~80만명의 국민당군대가 있었는데 일제가 침략하자 서쪽으로 이동하며 일본과의 전투를 회피했다. 미국은 <중립>·<불간섭>을 내세우며 뒤에서 일본의 중국침략을 부추겼다. 알려진데 따르면 1938 일제가 중일전쟁에서 소모한 전략물자의 92%가 미국으로부터 제공된것이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패퇴하고있을때 중국공산당의 8로군과 신4군이 일제에 타격을 가했다. 중국민중들은 유격근거지를 꾸리고 군대를 지원했다.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의 3차에 걸친 대대적인 <반공>공세에 맞서면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해야했다. 중일전쟁이 고착화되면서 다른 한편 일제는 1938.7~8 소련을 향해 하산호전투를 일으켰다. 하산호는 일제가 강점한 조선과 일제괴뢰국 만주국, 사회주의소련의 국경지대부근의 소련경내에 있다. 일제는 소련의 국경방위능력을 가늠하고 하산호서쪽의 장고봉과 무명고지를 장악해 포시예트만에서의 자유로운 군사활동을 보장하고 앞으로 블라디보스톡을 침공하기 위한 군사기지를 건설할 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일제는 하산호서쪽고지에 있는 소련군대를 철수할것을 요구했다. 소련이 이를 거부하자 7.29 소련국경을 넘어 고지를 강점했다. 소련이 반격했고 일제가 다시 재공격해 8.1 장고봉과 무명고지를 점령했다. 8.6 소련군대는 하산호를 우회해 일본군을 포위공격하며 결정적타격을 주고 고지를 되찾았다. 8.10 군사행동중지에 합의하고 전투는 종료됐다. 일제는 1년뒤 1939.5 몽골의 할힌골지역을 침략했다. 할힌골은 몽골동부국경지대를 따라 흐르는 강이다. 일제는 몽골의 동부돌출부를 강점하고 소련을 침략해 시베리아철도를 차단하고 소련으로부터 원동지역을 분리시킬 목적으로 이지역에 대규모병력을 투입했다. 몽골군대가 일제에 맞서 나섰으며 소련은 이를 지원했다. 7월 일제는 할힌골동부의 몽골영토일부를 강점했다. 소몽연합군은 8월하순 결정적인 공격을 벌여 일제군대를 몰아내고 몽골영토를 회복했다. 일제는 9.16 모스크바에서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하산호전투당시 김일성사령관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신태자밀영에서 군정간부회의를 갖고 소련을 지원하기 위한 배후교란작전을 벌일것을 결정했다. 할힌골전투가 벌어졌을때에도 <소련을무장으로옹호하자>는 기치를 들고 일제의 배후에서 대사하·대장강전투등을 벌여 일제의 대부대를 타격하며 지원했다. 소련으로의 진출이 막히게 되자 일본은 중국정복과 동남아시아의 유럽식민지로의 진출을 위해 소련과의 타협을 추진했다. 소련은 독일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조건에서 극동에서의 일제의 침략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다. 1941.4 일본은 소련과 중립조약을 조인했다. 소련은 그럼에도 적지않은 군사역량을 극동지역에 주둔시켰고 조선·중국과 국제연합군을 조직하며 장차 있을 대일전쟁을 준비했다. 일제는 전쟁의 방향을 서방열강의 패권지역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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