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12 테헤란회담에서 소련은 독일패배이후 일본공격을 합의했고 1945.2 얄타회담에서 2~3개월내 일본공격을 확인했다. 1945.4 소련은 일본에 중립조약을 갱신하지않을것이라고 통보했다. 1945.7 포츠담회담이 열렸다. 회담에서 소련은 대일전쟁에 대한 참전제의를 받아들였고 관련한 문제들이 토의됐다. 7.26 미국의 트루먼과 영국의 처칠, 중화민국의 장개석이 선언을 발표해 일본에 무조건항복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이에 소련은 8.8 연합국정부들의 요청에 따라 포츠담선언에 참가한다는것을 일본에 통고하고 8.9 일본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소련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시기 조선과 중국의 항일부대들을 지원했다. 1940~41 국제당은 극동지역에서 소련을 포함한 조선·중국과의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당시 정세에서 일제에 맞선 투쟁에 대해 논의했다. 김일성사령관의 조선인민혁명군도 여기에 참석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의 대일선전포고와 때를 같이해 8.9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했다. 몽골도 뒤이어 대일전쟁에 참전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작전계획에 따라 코리아반도의 경원·경흥일대를 해방하고 전과를 확대해갔다. 소련과의 협동작전으로 선봉항에 상륙해 청진일대로 진격했다. 이에 앞서 미국은 소련의 일본공격을 앞둔 시점인 8.6·9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며 힘의 우세를 시위하고 사회주의·반제민족해방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려고 책동했다. 8.15 항복선언을 한 일본은 사회주의권에 넘어갈것을 두려워하며 미군함선에 올라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동쪽으로 대서양, 서쪽으로 태평양을 장악하고 제국주의진영내에서 확고한 지위에 오르게 됐다. 미국은 전후 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큰 타격을 당한 유럽제국주의국가들의 전후복구를 지원했으며 1949.4 대소련·대사회주의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를 조직하고 <냉전>체제를 수립했다. 북대서양이란 미국중심의 관점으로 소련과의 사이에 유럽전역을 포괄한 지역적개념이다. 이는 북대서양연안국만이 아닌 그리스·튀르키예등을 포괄한것에서 드러난다.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위치를 중시했다. 미국은 일제의 A급전범중에서도 특등전범인 <일본천황>을 처벌대상에서 제외하고 일본군국주의세력을 이용할 생각을 했다. 미국은 코리아전에서 일본을 병참기지화했고 일본독점자본의 군수산업을 빠르게 재생시켰다. 중국의 장개석군대가 대만으로 쫓겨나고 미국은 이승만을 내세워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동일한 형태의 <태평양동맹>을 추진하려했으나 이승만의 <태평양동맹>은 실질화되지못했다. 오랜기간 제국주의의 식민지치하에 시달린 아시아의 태평양연안국들에서는 유럽과 달리 반제민족해방세력이 강했다. 2차세계대전이후 반제민족해방세력의 장성·강화로 더이상 구식민주의의 직접통치방식이 불가능해지면서 간접통치의 신식민주의방식이 적용됐다. 이들국가들에는 선거를 통한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정권을 수립한것으로 치장됐지만 이는 사회주의·반제민족해방세력을 억압한 파쇼통치체제하에서 수립된 정권들일뿐이었다. 일제패망후 해방된 나라들에서는 독립국가건설을 위한 활동이 벌어졌으나 미제와 유럽제국주의자들은 자신의 식민지를 존속시키려고 책동했다. 이로인해 베트남은 프랑스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전쟁에 돌입했다. 유럽에서 독일이 분단된것과 달리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아닌 조선이 분할됐다. 전범국이며 패전국인 일본이 아닌 피해국이고 승전국이 조선이 분할된것은 황당한일이다. 결국 코리아전이 발발했고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나아가지못했으며 미군주둔이 고착화되면서 분단은 공고화됐다. 이<태풍의씨앗>이 미국에 의한 일본군국주의의 부활과 이를 중심으로 한 미일<한>3각군사동맹, <오커스>·<스쿼드>로 자라나 태평양전의 폭풍으로 다가오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