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45.3.20 <본토수호를위한결호작전>을 수립한다. <결7호작전>에 의거해 일제는 병력을 제주도에 집결시켰다. 모슬포알뜨르비행장주변을 포함해 제주도전역에 갱도진지등을 구축하고 탱크·전투기·각종로켓포등을 집중배치해 마지막항전을 벌이려했다. 이를 무력화하기 위한 인민유격대의 활동이 벌어져 60여대의 비행기가 파괴됐다. 이렇게 항일의식이 높았던 제주도민들은 해방이후 빠르게 새나라건설사업에 나섰다. 일제때 면장을 지냈던 사람들도 간부로 포용했다. 역으로 여러지역에서 건준(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이 해방후초대면장을 맡기도 했다. 건준활동은 인민위원회건설로 이어졌다. 각읍면에서 인민위원회가 결성됐고 각리별로도 조직됐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제주도건준의 조직체계를 이어받아 위원장·부위원장·총무부·보안부·산업부·선전부등으로 구성됐고 약간명의 집행위원이 있었다. 산하조직으로 청년동맹· 부녀동맹·소비조합등이 있었으며 치안대활동은 주로 청년동맹제주도위원회산하 간부들이 맡았다. 인민위원회는 정부기관임을 표방했지만 미군정에서 이를 인정하지않아 행정기능보다 친일행위자들과 일본군패잔병의 횡포를 막는 치안활동에 주력했으며 적산(敵産)이나 군수물자도 보호·감시했다. 인민위원회는 각면별로 초등학교·중학원등을 설립해 자치교육을 실시했으며 대부분의 면사무소에서는 중요한 행정업무를 추진할때 사전에 인민위원회간부들과 협의하는것이 관행처럼 돼있었다. 1945해방직후 1년사이 일본등지에서 제주도로 귀환한 인구가 6만명에 이른다. 이는 제주도민의 1/3~1/4 에 해당한다. 미군정이 1947.2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제주시 15개군 15세이상남자들의 소학교이상졸업비율이 36%로 남반부의 다른 지역이 20%인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1945 전남군정청정보국장미드대위는 저서에서 <제주도인민위원회는이섬에서하나밖에없는정당인동시에모든면에서정부역할을한유일한조직체였다>고 밝혔다. 1945~46 제주도는 인민위원회의 통제속에 있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는 1946말 전국적으로 벌어진 9월총파업·10월항쟁에 가담하지않고 1947 3.1사건전까지 역량을 유지했다. 1946.8.1 제주도(島)의 도(道)승격은 우익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에 맞게 경찰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9연대가 창설되는등 공권력이 강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