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5.17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5.18 오후4시에 7공수여단을 광주시내에 투입했다. 이들은 시위학생이 아닌 일반행인에게도 폭력을 가했고 5.19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합류해 5.20 시위대규모가 20만명이상으로 늘어났다. 계엄군은 집단발포했고 5.21 군인들의 부당한 폭력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시민들은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광주외곽봉쇄에 들어갔다. 광주는 완전히 고립됐고 오히려 당시 상황은 외신기자들에 의해 외국으로 전송됐지만 전국각지엔 전두환신군부가 조작한 온갖 유언비어들이 확산됐다. 시민군은 도청을 장악하고 치안을 보장했다. 5.22 시민수습대책위를 조직하고 계엄군과의 협상을 시도하는 한편, 철저히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면서 광주시내의 질서를 유지했다. 공권력의 공백상태에서 단1건의 사건사고도 발생하지않았으며 상점가·금융기관·백화점에서의 약탈도 전혀 없었다. 도청의 공무원들도 정상출근해 양곡방출과 부상처리등의 행정업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것으로 알려졌다. 자발적인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며 비상시기의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이시기 신군부는 미국측과 회동을 갖고 대책수립에 부심했다. 5.26 준비를 갖춘 계엄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주투쟁위원회는 5.26오후 마지막기자회견을 가진다. 투쟁위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은 협상의 여지를 묻는 외신기자에게 <일부수습위원들이군과협상중입니다만성과는전혀없습니다.계엄군은무조건무기반납만을주장하고있습니다.협박만일삼는그들과무슨협상을할수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윤상원대변인은 <우리는오늘여기서패배하지만내일의역사는우리를승리자로만들것입니다>라는 마지막메시지를 남겼다. 민주투쟁위원회는 계엄군의 재진입을 대비해 시민들을 내보내고 일부자원자들을 중심으로 역사에 기록돼야할 마지막을 준비했다. 광주항쟁은 한지역의 투쟁이 아니었다. 광주항쟁에는 전국적요구가 반영돼있었다. 광주민중의 질서정연한 자치활동과 헌신적인 투쟁은 <폭동>이라는 비난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으며 투쟁하지않은 이들의 양심을 울렸다. 새로운 사회의 주인인 민중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과학적확신을 귀중한 역사적경험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