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세계경제대공황은 몇몇나라의 파쇼화를 가속화시켰다. 일본은 금융산업이 아직 성숙하지못한 상태에서 1923 간토대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대출이 부실화되고 1927 스즈키상점의 파산선언이 뱅크런으로 이어져 수십개의 은행이 지급불능을 선언했다. 중소은행들이 수십개 망했다. 1928 268개중소은행이 큰 은행에 병합됐다. 미쓰이·미쯔비시·야스다·스미또모 같은 큰 은행들에는 자금을 대주면서 파산을 모면하게 해줬다. 1930년대 재벌계은행들은 영향력을 확대하며 산업전반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재벌과 그와 유착한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은 고조됐다. 1929 세계경제대공황이 닥치자 일정부는 물가안정과 수출촉진을 명목으로 긴축재정정책을 실시하고 고정환율제로 복귀했다. 그러나 엔화의 평가절하를 위해 고정환율제를 포기할수밖에 없다는것을 인지한 이들이 달러화를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게 되자 이들에 대한 분노는 더욱 확고해졌다. 세계적디플레이션으로 곡물가격이 43% 폭락하고 소규모지주들조차 세금을 낼수 없게 되자 소작농들이 쫓겨나고 소작쟁의가 급증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인하되고 실업율이 치솟았으며 매출도 줄어들면서 소매상인들의 도산이 2배이상 급증했다. 여성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포함해 노동쟁의등 노동자·농민들의 투쟁도 늘어갔다. 경제위기에 사회적으로 여급서비스업과 같은 직종이 늘어나면서 전통적규범과 도덕질서가 급격히 훼손되고있다는 위기감까지 확산됐다. 한편 일본내각은 1927.7.25 <제국의만몽에대한적극적근본정책>이라는 <다나카상주서>를 내놓고 중국에 대한 침략계획을 수립했다. 1928 기차폭발로 만주군벌 장작림을 암살했다. 관동군의 이시와라와 그추종자들은 자본주의시스템의 이기적이익이 아닌 <사회적평등과국가에대한충성을기본원리로하는새로운사회적질서>를 창조할 일종의 시험장으로 생각하면서 1931 만주사변과 1932 만주국수립이 <서방제국주의에맞선아시아의해방을추구한다>고 망상했다. 이시기 일본은 군수산업을 중추로 하는 중화학공업을 확대·강화하면서 닛산콘체른·일질콘체른등의 신흥재벌이 등장하며 경제의군사화가 강화됐다. 1932.5.15 청년해군장교집단이 총리 이누카이를 암살한다. 이후 군부가 정계에 진출하고 군국주의사상이 강화됐다. 일의회정치·정당정치는 쇠퇴하며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25 <치안유지법>이 제정되고 <일본천황>을 절대권력화했다.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으며 일공산당에 대한 전향공작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1936.2.26 일본육군내의 <황도파>청년장교들이 파쇼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원로대신들을 죽이고 천황친정이 실현되면 정·재계부정부패와 농촌의 빈궁문제를 해결할수 있을것이라고 보고 내각원로대신들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오카다총리대신암살은 실패했지만 다카하시·사이토등 총리를 역임한 당시 대신들을 암살했다. 2.27 계엄령이 선포되고 2.28 천황의 원대복귀명령이 내려지자 명분을 잃고 원대복귀하면서 마무리됐다. 일부는 자결했고 일부는 사형당했다. 처형자중에는 순수파시스트로 불린 민간인가담자도 포함됐다. <황도파>반란의 실패는 일본육군내 비<황도파>로 불리는 <통제파>의 정계실권장악의 계기가 됐다. 통제파의 중심인물인 도조는 1937 관동군참모장으로 중일전쟁의 확대를 유도하고 1938 육군차관, 1940 고노에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3국동맹조약참가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령인도차이나의 일본군주둔을 밀어붙이고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준비를 추진했다. 1941 내각총리대신으로 진주만공습명령을 내렸고 1944 마리아나제도를 잃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