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1797 전비마련을 위해 금태환을 중단했다. 이후 영국에서는 금만이 진짜 돈이라며 금태환을 통해 영국은행을 정상화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리카도등 지금(地金)론자와 금태환을 반대한 주로 스코틀랜드출신인 반지금론자의 지금논쟁이 있었다. 영국파운드는 1819 금과 연계되는 법령이 마련되고 1821 법정화폐의 금태환재개가 법적으로 규정되면서 금본위제가 시행됐다. 영국에서는 1717 이래 사실상 금이 통화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여전히 소액동전의 편의문제로 은화의 역할이 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는 1878까지도 금은복본위제였으며 프랑스의 금본위제도입은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패배와 독일의 금본위제도입이 영향을 미친것으로 복본위제 자체에 원인이 있었던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 금본위제도입의 이유에 대해서 여전히 논란이 많다. 로스차일드가는 나폴레옹전쟁(1803~15)기간 영국과 프랑스의 군수산업으로 큰 이윤을 취하면서 세계의 금시장을 독점적으로 주도하게 됐다. 1825 영국에 금융공황이 발생하자 영국은행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1844 영국정부는 지방은행들의 발행권을 제한하고 영국은행의 발권독점권을 보장해주고 금보유를 집중시킨다. 당시 국제거래에서는 하나의 신뢰받는 은행권이 없었으므로 금·은만이 국제통화로 이용됐다. 1862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화폐개혁을 실시해 은화를 발행했는데 순도의 차이로 해서 프랑스은화를 밀어내자 이에 대응해 프랑스도 은화의 순도를 조정하고 스위스도 이경쟁에 따라나섰다. 각국통화의 상호의존성이 대두되자 1865 국제회의를 열고 라틴통화동맹(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 이후 그리스·스페인)을 조직하고 순도를 통일시켰다. 라틴통화동맹은 1867 파리국제박람회에서 국제금융회의와 통화적극주의를 추진하고 프랑스의 프랑화중심의 세계적통화통합을 이룬다는 장기적계획의 일환으로 나왔다. 이는 1871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로 사실상 중단됐지만 독일(1872)·프랑스(1878)·미국(1879)에서 금본위제도입이 이뤄지면서 국제통화로 금이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됐다. 특히 영국파운드화는 세계무역의 60%를 장악하고 런던금융시장은 전세계투자의 절반을 소화했으므로 당시 파운드화는 기축통화로써 기능했으며 영국의 금본위제가 금의 가치를 담보하게 됐다. 1880~1914, 1차세계대전으로 금본위제가 붕괴되기전까지의 이시기를 <고전적금본위제시기>라고 한다. 19세기 금본위제는 파운드화의 기축통화시대였다. 금본위제하에서 영국은 10년마다 주기적인 경제공황에 시달렸다. 이는 은행업자들에게 부를 늘릴 또다른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