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유엔감시하의 단독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선출됐다. 1947.11 유엔에서 코리아문제가 결의되고 1948.2 유엔은 유엔이 감독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를 진행하기로 하면서 남단독선거가 결정됐다. 미군정과 외세의 개입을 반대해 투쟁해오던 코리아민중은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했다. 여운형·김구등은 입장차가 있었지만 모두 우리민족의 힘으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북측과 긴밀한 연계를 가져왔던 여운형은 1947.7 암살됐고 김구는 1948.4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민족독립국가건설에 뜻을 모았다. 유엔감시하의 남단독선거는 군정치하의 파쇼적상황에서 진행됐다. 이에 반대한 남민중의 투쟁이 거셌다. 미군정을 반대한 투쟁에서부터 남코리아에는 무장대가 형성됐다. 1948 5.10단독선거를 앞두고 이들을 정리하려는 미군정의 폭압도 더 강화됐고 정국이 격화됐다. 4.3 제주에서 무장항쟁에 나섰다. 8.15 <대한민국>정부가 구성되고 반대세력을 결정적으로 제압해야했다. 미군정은 철수일정을 미루고 이승만정부와 제주도토벌에 나섰다. 1948.10 여수에 주둔하고있던 14연대는 제주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무장항쟁에 나섰다. 이는 여수·순천지역의 군민항쟁으로 확대됐다. 이승만정부는 이에 대응해 정부가 들어선지 2달만에 첫계엄령을 내렸다. 당시 아직 계엄에 관한 법령이 없어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고 한다. 계엄령이 제정된것은 이듬해 1949.11.24이다. 제주지역의 초토화작전이 시작됐고 이를 위해 1948.11.17 2번째 계엄령이 발포됐다. 1948.12.12 3차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이 담긴 결의안195호가 통과됐고 제주지역의 계엄은 12.31 해제됐다. 계엄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때 법률이 정하는바에 따라 선포하는 명령이다. 당시 남코리아는 무장대가 조직돼 활동하고있었고 전시상황에 준했으므로 이승만은 정권을 승인받기 위해 계엄을 선택했다. 제주민중이 학살당할때 <대한민국>정부의 국무위원들은 자축의 술잔을 들었다. 이승만은 또 북의 정권을 인정할수 없었으므로 <북진통일>을 주창했다. 남쪽에는 무장대와 토벌대사이에, 38선부근에서도 군사적충돌이 계속됐다. 평화통일을 촉구하던 세력은 이승만의 정적들이었고 1949.6 <국회프락치>사건등으로 정치권에서 축출됐으며 김구도 1949.6.26 암살됐다. 제헌의회가 역할을 다하고 정식으로 국회를 구성하는 1950.5 2대총선에서 반이승만세력이 우세를 점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방식이므로 이승만은 이결과를 주의하지않을수 없었다. 1950.6 전쟁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북에서는 북남간 대화를 제의했으나 북의 파견단을 38선부근에서 체포구금했다. 2대국회개원일을 앞두고 북최고인민회의에서 남북대화를 제의했으나 실현되지못했다. 38선을 시찰한 덜레스미국무부고문이 국회개원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대한민국>은 사실상의 계엄상태에서 건국됐으며 전면전을 치르면서 공고화됐다. 이승만은 전쟁중이었던 1952 2대대선을 앞두고 간선제로는 당선이 불확실했으므로 직선제개헌을 추진했다. 뜻대로 되지않자 계엄을 선포하고 개헌을 강행했다. 이승만은 직선제의 금권·관권선거로 정권을 유지할수 있었다. 1960 4.19항쟁으로 다시 계엄을 실시했지만 이승만은 하야하지않을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