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 항쟁의기관차〉 금융자본집단의 형성과 책략

인류역사의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수메르의 쐐기문자(설형문자)에서도 재화를 융통(금융)하는 활동들의 흔적을 발견할수 있다. 사람은 사회를 형성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분리돼 나와 자연계의 일반적인 존재들과 다른 사회라는 사람만의 독특한 생존방법을 창조했다. 또 사람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남기 위한 오랜 기간의 투쟁으로 점차 발전해왔다. 생산력에 한계가 있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재화가 제한적인 탓에 개인소유·사적소유가 발생했다. 인류의 물질기술적수준도 낮고 사상문화적수준도 높지않은 상태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발전과정이었다. 인류문명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공동생산·공동소유의 협업·분업으로부터 발생해 사적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한 사회제도로 발전했다. 고대의 문자들은 주로 사회의 법률을 기록하고있다. 그내용은 주로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화를 훔친자는 처벌하고 빌려간자는 얼마간의 이자를 지불하게 하는것이다. 이는 당시 재화의 융통행위가 있었다는것을 확인해준다. 가진자는 더 많은것을 원하고 가지지못한자는 생존과 생활을 위해 가진자의것을 빌려야
하는 상호간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는 지점에서 금융이 발생한다.

금융은 본연의 의미에서 자금의 융통을 의미한다. 어떤 사회든 어떤 경제활동이든 자금의 융통을 필요로 한다. 사람은 생존과 생활을 위한 여러재화를 만들어내고 향유하며 살아간다. 이투쟁은 오랜 기간 자급자족의 형태를 띠었다. 자급자족은 가장 기초적인 생존활동이며 가장 기본을 이루는 경제활동이다. 재화의 교환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이었지만 계속 존재해왔고 교환의 발달은 그편의를 위해 화폐의 발달로 이어졌다. 물물의 교환은 교환에서 기본이다. 실제쓸모는 재화 그자체에 있어서다. 금속화폐·주조화폐 또한 의미가 있다. 재화와 직접적으로 교환될수 있는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돼서다. 그편의성으로 금속화폐는 주조화폐로 발전해왔고 최근에는 신용화폐로 발전하고있다. 신용화폐란 미래에 있을 지불약속이다. 한마디로 빚이다. 신용거래란 빚을 내서 현재의재화와 교환하는것이다.

자본주의적생산의 발생을 위해서는 값싼 노동력과 함께 어떤 생산수단으로도 전화할수 있고 노동자들의 고용에 쓸수 있는 화폐형태의 대량적인 부가 축적돼있어야한다. 중세 대량적인 화폐적부가 상인과 고리대금업자들에 의해 축적되고 이상업자본과 은행자본이 산업자본의 토대가 됐다. 큰 화폐적부를 축적하는데 가장 중요한 원천의 하나는 아메리카대륙의 정복이었다.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을 약탈했으며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들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해 막대한 부를 모았다. 인도와의 무역등 식민지무역의 독점권과 폭리를 통해 이익을 취했다. 식민지침략과 국채제도, 근대적조세제도와 보호무역제도등은 자본축적의 중요한 계기였다.

상업자본가에서 권력자로

11세기이후 지중해를 중심으로 상업이 점차 성장한다. 중세봉건시대가 토지 를 중심으로 한 농업의 시대였다면 <상업의부활>이라고 할수 있을정도로 동·서양의 교역이 활발해졌다. 이슬람·인도와의 무역이 무역차액에 따른 이윤을 가져다준다는것을 깨닫게 됐고 그중심에 이탈리아상인들이 있었다. 국제적상업·무역업은 환전상을 필요로 했고 이탈리아에서는 환전업이 번성하면서 은행업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의 환전상들은 금과 은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놓고 벤치에 앉아 상인들과 거래했고 은행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Bank는 이탈리아어에 벤치·탁자를 의미하는 Banco에서 유래했다. 복식부기등 경영개념들이 이시기에 이탈리아상업에서 등장했고 당시의 경제현상을 분석하면서 중상주의가 나왔다. 15~18세기 중상주의는 화폐와 재부를 같이 보면서 화폐를 보다 많이 축적하는것이 곧 부의 축적이라고 생각했다. 상품의 매매과정·유통과정에서 이윤이 발생하고 재부가 증가되는것으로 이해한것이다. 이런 이론은 부의 원천은 노동이며 생산과정에서 이윤이 증대된다고 주장한 아담스미스의 <국부론>(1776)등 부르주아고전정치경제학에 의해 비판·부정됐다.

당시 대표적인 이탈리아의 은행이 메디치은행이다. 피렌체의 은행조합은 플로린(Florin)이라는 금화를 제작해 유통시켰고 유럽전역에 통용되는 국제통화로 자리잡았다. 1422 피렌체에는 72명의 은행가와 어음중개인이 금융가를 형성했다. 그중 메디치은행이 가장 번성했다. 메디치은행은 1397 지오반니데메디치에 의해 설립됐고 프랑스의 이탈리아침략후 추방되면 서 1494 문을 닫는다. 메디치은행은 교황청의 재정업무를 전담했으며 피렌체공화국의 비공식재무조직이었다. 교회성직자·귀족·도시국가등 상류층을 상대로 어음증서를 거래하고 돈을 빌려줬다. 메디치는 강력한 재력을 바탕으로 1421 피렌체의 수반인 곤팔로니에레에 선출돼 도시국가를 경영했다. 아들 코시모는 메디치은행을 교황청의 주거래은행으로 만들고 로마·나폴리·브뤼헤·리옹등에 지점을 세우는등 전유럽으로 확장시켰다. 코시모가 세상을 떠나기전 이미 메디치은행은 방만한 운영으로 한계를 보였다. 역사적으로 메디치가는 은행업보다 이탈리아의 최고권력이자 피렌체의 문화·예술의 후원자로 유명하다.

1179 교황청은 3차라테라노공의회에서 주교선출·성직자자격요건·교구및수도회관계에 관한 개혁법령을 처리했다. 이중에는 고리대금업등에 관한 법도 있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6장35절에서는 <아무것도바라지말고빌리라>고 말한다. 이에 의거해 교회에서는 이자를 금지했다. 이런 생각이 여러법령으로 구체화돼 중세 봉건시대까지 이어져왔으며 대금업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대금업자들에 대한 임종의식과 기독교인으로서의 매장을 거부했다. 구약성서는 기독교·유대교 양쪽 공통의 경전이지만 서로는 서로에게 이교도여서 서로간의 금융거래는 금지되지않는다고 해석됐다. 봉건기독교사회에서 대금업자들이 주로 유대인이었던 주요한 이유다. 또한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하지못하고 게토(Ghetto)에 모여 살아야했기에 기독교사회에서 결국 유대인은 주로 상업·대금업에 종사하게 됐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상인>은 16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베네치아는 지중해무역의 중심으로 번성했다. 책의 내용은 문학적으로 각색된 내용으로 역사적배경을 갖고있지않지만 고리대를 하는 유대인상인들에 대한 시대적인식을 반영한다. 그들의 부는 질시의 대상이었고 아쉬울때는 어쩔수 없이 유대인대금업자를 찾아가지만 그들은 자기이익을 위해서는 악랄한 짓도 서슴지않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질시·공포의 대상, 그것이 유대인에 대한 일반적인식이었다.

메디치가출신의 교황레오10세가 5차라테라노공의회를 승계하게 된다. 1515.5 10차회기에서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가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전당포로 <신심의산(Montes Pietatis)> 을 운영하는것에 대한 문제가 다뤄졌다. 그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받는것이 고리대금업이라는 도미니크회수도사들의 비난이 있었고 공의회는 이것이 전적으로 합법적이며 고리대금업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추후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들은 성직자·수도자·평신도를 가리지않고 파문에 처한다고 발표했다. 시대는 더이상 대금업을 불법시할수 없는 분위기로 변화했다.

로스차일드가, 금융자본집단의 뿌리

18세기중반 독일프랑크푸르트 게토에서 태어나 자란 마이어암셀로스차일드(1744~1812)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 아버지가 일했던 하노버의 유대인 오펜하이머가문에서 견습생으로 금융업을 시작했다. 1764 고향 프랑크푸르트 게토로 돌아와 아버지의 환전상을 이어나갔다. 부유층을 만나 조금씩 사업을 키워나갔고 우편물사업을 보면서 <빠른정보가부를낳는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게 된다. 1769 마이어는 헤센영주의 궁정어용상인으로 임명됐다. 그는 곧 결혼했고 다섯아들을 뒀다. 딸들은 결혼한 뒤 사업에 관여하거나 상속받지못하게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있었다. 다섯아들은 암셀(1773~1855)·솔로몬(1774~1855)·나탄(1777~1836)·칼(1788~1855)·제이콥 (1792~1868)으로 셋째의 영국식발음은 네이선(Nathan)이며 나중에 넷째는 칼만으로, 다섯째는 제임스로 이름을 바꾼다.

1785 독일헤센의 영주로 빌헬름9세가 즉위했다. 빌헬름9세는자기재산을 채권거래에 투자했다. 로스차일드가는 빌헬름의 재무담당관 부데루스의 후원을 받으며 조금씩 채권거래를 맡게됐다. 이전20년간 납부한 연평균세금이 2000굴렌에서 17952배로 늘었고 그이듬해에는 1만5000굴렌으로 수직상승했다. 1799 신성로마제국은 로스차일드가문에 황실어용상인이라는 명예를 하사했다. 1803 나폴레옹전쟁이 시작됐다. 빌헬름은 당시 나폴레옹보나파르트에 대항하고있던 오스트리아와 거래를 하려했다. 프랑크푸르트의 대형은행들은 리스크때문에 이거래에 나서려하지않았다. 마이어의 아들들이 나서서 이채권중계를 성사시켰다. 아들들은 1804 빌헬름의 처가인 덴마크·스웨덴왕국에 자금을 융통해주는 채권거래도 대행했다. 게르만계대형은행들은 로스차일드가가 이거래를 한 사실을 알고 반발했지만 빌헬름9세는 로스차일드가를 최고어용상인으로 임명하고 헤센용병의 급여를 담당하는 대리인으로 지정했다.

1798 네이선은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유대인공동체의 도움으로 거래선을 뚫었다. 그는 영국산·인도산·북미산직물들을 사서 유럽대륙에 팔고 금융업으로는 대륙어음에 1%의 수수료를 받았다. 당시 1.5~2%의 평균수수료율보다 낮았다. 1800 로스차일드가의 영국자산은 크게 증가했다. 1803~15 나폴레옹전쟁시기 로스차일드가문은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역이용해 영국과 대륙의 상품가격차를 활용, 도주하는 귀족들의 자산을 관리해주고 영국의 전비마련, 연합국의 국채를 사들이면서 성장했다. 1809 네이선은 유대인공동체에 있던 맨체스터의 사무실을 런던금융지구시티로 옮겼다. 1811 로스차일드상사를 세웠다. 네이선은 빌헬름의 자산관리로 빌헬름의 수익률을 보장해주고 자신의 이익을 챙겼으며 빌헬름의 자금을 관리한다는 소문에 다른독일소영주들도 영국으로 자금을 빼돌려 로스차일드상사에 위탁했다. 막내 제임스는 1810 파리에 정착했다. 네이선은 제임스와 협력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금을 사들이거나 판매하는 방식으로 시세차익을 취하면서 대량의 금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1812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을 단행했다. 이때 영국웰링턴공작 아서웰즐리가 스페인·포르투갈에서 프랑스서부전선을 공격하는데 자금난을 겪고있었다. 영국측의 요청으로 네이선은 웰링턴에게 군자금을 보내 전쟁을 지원했다. 1814 나폴레옹은 전쟁패배후 유배됐다. 1815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탈출해 파리로 돌아와 재집권했다. 유럽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았고 로스차일드가문은 영국과 연합군에 군비를 대부했다. 나폴레옹의 군대에도 군비를 대부했다. 1815 워털루전투직후 네이선은 대량의 영국국채를 보유하게 된다. 당시 영국은 군비마련을 위해 대량의 국채를 발행했고 그양이 영국국민총생산액의 2배를 넘었다. 그중 62%를 네이선이 소유하게 됐으며 그뒤 네이선은 영국은행의 공채발행을 주도하는 실권자가 됐다.

1812 마이어암셀로스차일드가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전쟁 은 마이어의 아들들이 그의 사업을 물려받아 자리잡는 중요한 계기였다. <해가지지않는나라>로 부상한 영국은 그들의 사업에서 핵심적인 무대가 됐으며 전쟁은 그들에게 기회를 줬고 봉건영주들의 재산을 이용해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을 형성했다. 로스차일드의 이름은 1585 사망한 그들의 선조 이작엘하난로스차일드로부터 시작된다. 로스차일드는 붉은 방패(RothenSchild)를 의미하는것으로 붉은 방패를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마이어는 아들들에게 하나의 화살은 부러뜨리기 쉽지만 다섯개의 화살은 부러지지않는다는 스키타이의 어느왕의 일화를 유언으로 남겼다. 왕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너희들이결속해있는한그힘은강력할것이다.그러나흩어지면그번영은끝난다.>고 말했다. 로스차일드가문의 문장에는 다섯개의 화살이 그려졌다. 이화살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켜 경쟁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표현했다.

금융권력, 전쟁과 공황의 역사

나는 어떤 꼭두각시가 권력을 획득하는지 신경쓰지않는다.
영국의 통화를 지배하는자가 대영제국을 지배하는것이고
나는 영국의 통화를 지배한다.
(네이선로스차일드)

1694 영국의회법에 의해 중앙은행으로 영국은행이 설립됐다. 당시 영국왕 윌리엄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심각한 재정위기에 직면하고 정부가 120만파운드를 차입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화폐발행권(Chartered)을 주는 방식으로 영국은행을 설립했다. 영국은 1793부터 22년간 나폴레옹과의 전쟁까지 치르면서 과도한 화폐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로스차일드는 영국국채를 사들이면서 이자금을 보장해 사실상 영국은행의 주인이 됐다. 이를 빌미로 1833 로스차일드가 주도하는 영국은행은 처음으로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1844 은행법을 개정해 영국은행을 제외한 다른은행들의 화폐발행을 금지시켰다. 19세기중반 3차례의 금융공황을 거치면서영국은행은 시중은행에 최종적으로 자금을 대부하는 중앙은행으로 자리매김했다. 1867 유럽각국은 국제금융통화회의에서금본위제를 합의했다. 이는 당시 상당량의 금을 장악하고있는 로스차일드가가 각국의 화폐를 통제하는 장치나 다름없었다.

미국의 식민지정부에서는 식민지유가증권(Colonial Scrip)이라는 지폐를 유통시켰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영국은 1764 통화법(Currency Act)을 제정해 식민지에서의 화폐발행을 금지했다. 세금은 금전이나 은전으로만 지불하도록 했다. 영국의 환전상들은 식민지의 자립을 우려했다. 미국의 자체화폐를 만든 기획자였던 벤자민프랭클린은 우리자신의 돈을 만들수 없게 된것이 미국독립전쟁의 주원인이 됐다고 회고했다. 전쟁자금마련을 위해 화폐가 대량발행돼 심한 인플레를 초래했고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됐다.

독립전쟁이 거의 끝날무렵 1781.5 대륙의회는 북미은행(Bankof North America)의 창설을 결정한다. 북미은행은 40만달러를 모아서 프랑스에서 빌려온 금을 은행에 보관해놓고 화폐를 발행했다. 발행된 화폐에 대해서는 이자를 받을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있었다. 즉, 영국의 발행권을 가진 중앙은행처럼 개인소유의 은행과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영국은행의 화폐통제를 거부해 독립전쟁을 치르고 다시 미국인 한개인에게 화폐발행권을 넘겨줬다. 1785 의회는 발행권을 연장해주지않기로 했다. 북미은행의 창립자중 한명으로 미재무장관이 된 알렉산더해밀턴은 전쟁채무처리방법을 놓고 미국무장관 토마스제퍼슨과 갈등을 빚었고 해밀턴은 남부가 요구하는 수도이전수용의 대가로 채무인수법안을 통과시킬수 있었다. 뉴욕은 독립국가의 수도는 되지못했지만 8000만달러의 채권을 발행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월가(Wall Street)를 가지게 된다. 1783 전쟁이 끝나고 국공채와 은행주중심으로 증권거래가 보급됐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중 하나가 1784 해밀턴이 세운 뉴욕은행으로 1920년대 미재무장관을 지낸 멜론가의 멜론파이낸셜(1869)과 2007 합병해 뉴욕멜론은행으로 이어져오고있다. 1790 독립전쟁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대규모국채를 발행하고 1791 의회는 20년기한의 미국제1은행의 설립을 결정한다. 또 1794 국채판매를 위한 주식경매시장의 개장을 합의한다. 이렇게 뉴욕증권거래소가 탄생했다. 1811 미국제1은행의 기한이 종료될때 자본1000만주가운데 외국자본비율은 700만주로 70%를 차지했다. 당시 네이선이 영국은행을 장악한만큼 외국자본은 사실상 네이선의 소유였다.

1817 미의회는 미영전쟁(1812~15)기간 인플레이션과 군비충당으로 미정부의 신용과 부채상황이 심각해 다시 20년을 기한으로 하는 미국제2은행의 설립을 승인한다. 민간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한것이어서 정부가 대주주로 20%의 지분을 가지고있었지만 나머지 80%는 개인투자가들이 가진 민간은행이었다. 개인투자가들은 비밀에 부쳐져 사실은 20%의 정부자금을 가지고 개인투자가 이뤄지는, 개인들은 자기돈없이 투자를 하는 거대한 사기극이며 30%의 주주는 외국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은행에 대한 서민들의 여론은 좋지않았다. 7대대통령 앤드류잭슨은 은행의 공인연장에 반대했고 이를 공약으로 1832대선에서 당선됐다. 1833 잭슨은 제2은행에 대한 정부자금예탁을 종료하는 집행명령을 내렸다. 정부자금은 다른주정부은행들에 맡겨졌다. 은행은 통화량을 줄이며 디플레를 조장했고 경제위기로 의회를 압박했지만 잭슨은 발행권연장을 막는데 성공한다. 1835.1.8 잭슨은 제2은행에 남은 국가의 부채를 완전히 갚아드디어 빚없는 정부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1.30 잭슨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공했다면 미대통령의 첫암살이 됐겠지만 불발돼 미수로 끝났다. 제2은행기한이 종료되자 로스차일드가는 1837 어거스트벨몬트를 파견했다. 그는 뉴욕에 자리잡고 로스차일드의 자금을 이용해 미국국채를 사들이는 업무를 했다. 이를 기반으로 자기이름의 은행을 설립했다

1848 미국캘리포니아의 금광발견과 1851 호주의 금광발견으로 이들 나라들에 대한 수출이 급증했다. 금은 유럽에 쌓였다. 미국은 영국자본의 유입으로 경기가 과열돼있는 상황이었다. 영국은 연방국채의 46%, 주채권의 58%, 미국철도채권의 26%를 보유하고있었다. 크림전쟁이 끝난후 러시아의 곡물수출이 재개되면서 식료품가격이 급락했고 철도사업은 위축됐으며 철도부지주변의 부동산가격이 하락했다. 이는 소비둔화와 생산격감으로 이어졌다. 1857 런던의 금리인상으로 영국자금이 미국에서 유출되기 시작하는 동시에 오하이오생명보험신탁뉴욕지점이 파산했다. 미국철도회사들도 파산하거나 주가가 크게 하락했다. 뱅크런사태가 찾아왔고 금융공황은 영국과 유럽대륙으로 번졌다. 전세계적으로 135개은행이 파산했고 4200만달러의 자본이 사라졌다. 최초의 전세계적공황이었다. 공황기에 어음유통은 중단되고 현금만 선호됐다. 영국은행의 은행권만이 유통능력을 보여줬다. 공황은 1861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마무리됐다.

남북전쟁의 전쟁자금에 로스차일드가는 많은 이자를 요구한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미대통령 에이브라함링컨은 의회를 설득해 미재무부가 담보없이 20년 동안 5%의 이자가 붙는 국채발행을 할수 있도록 승인받았다. 1861 미연방정부는 최초의 법정화폐<그린백>을 발행했다. 링컨은 약4억5000만달러를 발행했다. 그래도 부족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규모국채를 발행해 은행컨소 시엄이 인수하게 했다. 금시장을 독과점적으로 장악하고있던 로스차일드의 입장에서는 금담보없는 화폐는 그들의 통제를 벗어난 위험한 시도로 금시장에 타격을 가했다. 재선에 성공한 링컨은 전쟁막바지인 1865.4 암살됐다.

로스차일드는 1870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도 큰 이익을 취했다. 당시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개인자산을 관리하던 블라이흐뢰더가는 1830년대부터 베를린에서 로스차일드가의 대리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들은 전쟁전에 이미 전쟁발발정보를 파악하고 사전에 전쟁당사국의 채권과 주식을 처분해 그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중에는 전시채권을 높은 할인율로 싼
값에 인수했다. 전쟁으로 헐값이 된 채권과 주식을 다시 사들이는 방식으로 높은 이윤을 취했다. 전쟁후에는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50억프랑의 배상금을 갚기 위해 추진한 공채발행에 관여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공황·전쟁과 금융자본집단의 독점체제

1907 공황은 구리왕이라고 불린 오거스터스하인츠가 유나이티드구리회사의 주식을 매점하다가 실패해 발생하게 됐다. 하인츠에게 자금을 댔던 뉴욕의 3위 신탁회사였던 니커보커가 영업정지를 당하자 뱅크런이 발생했고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은행에서 지급을 제한해 들어갔다. 많은 은행들이 준비금부족으로 파산했다. 이때 JP모건이 등장해 자산을 풀면서 금융위기를 해소했다. 당대 석유재벌 록펠러도 자산을 내놓을것을 밝혔다. TC&I(테네시석탄철강철도회사, Tennessee Coal, Iron and RailroadCompany)의 주가폭락사태가 발생하자 카네기의 US스틸이 TC&I를 인수하면서 급한 불을 껐다. 이듬해 록펠러2세의 장인 넬슨앨드리치상원의원은 경제위기의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한 국가통화위원회(NationalMonetary Commission)의 설립을 제안했고 여기에서 1913 미연준(연방준비제도, Fed, Federal Reserve System)창설안이 나오게 된다. 이계획을 세우는 회의에는 앨드리치와 피아트앤드루재무장관, 쿤롭계열의 내셔널시티은행 프랭크밴덜립, 롭의 사위이자 독일계은행가 폴와버그, JP모건의 동업자 핸리데이비슨, 모건계열의 뉴욕퍼스널내셔널시티은행의 찰스노턴, 모건계열인 뱅커스트러스트사의 밴자민스트롱등이 참석했다. 미연준은 설립직후 FRB(Federal Reserve System Board, 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 많이 알려졌다. 이사회는 7명으로 구성되며 의장·부의장의 임기는 4년이다. 연방준비은행(FRB, Federal Reserve Banks)은 보스턴·뉴욕·필라델피아·클리블랜드·리치몬드·애틀란타·시카고·세인트루이스·미니애폴리스·캔자스시티·댈러스·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다. 각은행이 맡고있는 담당구역의 크기는 비준당시 인구분포에 따라서 설정됐다.

연준은 매달1회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Federal Open MarketCommittee)회의를 하고 그결과를 공시한다. 회의에서는 금리조정등 중요금융정책을 결정한다. 회의의 성원은 이사회 7명과 지역연방준비은행 5명의 총12명으로 구성된다. 뉴욕연준총재만 당연직부의장을 맡는다. 1914.5 설립당시 미연준의 총발행주식20만3053주중 뉴욕내셔널시티은행3만주, 퍼스트내셔널은행1만5000주, 뉴욕내셔널상업은행2만1000주,하노버은행1만200주, 체이스은행6000주, 케미컬은행6000주 이상6개은행이 미연준의 지분40%를 소유했다. 이후 은행간 인수합병등 지분구조의 변화로 1983기준 지분율은 씨티은행15%, 체이스맨해튼14%, 모건스탠리9%, 하노버7%, 케미컬8%를 소유, 일반금융기관이 총53%의 지분을 가지게 됐다. 이를 통해 금융자본집단은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1914~18 1차세계대전으로 영국등 유럽각국은 다시 화폐를 남발했다. 1913~19 물가는 영국2.5배, 프랑스3배, 독일8배가 상승했다. 패전국 독일은 1922~23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1867 금본위제합의로 확대되던 유럽각국의 금본위제체제는 완전히 파탄났다. 이를 통제하기 위한 조치중 하나로 1919.9 로스차일드은행에서 영국은행총재등 5개은행의 은행장이 모여 런던시장의 금가격을 결정하는 회의를 가진다. 이회의에서 결정되는 금가격은 지금까지도 국제금거래가의 기준이 되고있다. 2012 금·은가격조작의혹이 제기되는등 논란이 일자 신뢰회복을 위한 시스템개편작업을 추진해 2015 참여하는 국제금융기관을 8개로 확대교체
하고 기준가산정에 전자입찰방식을 도입하는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시도했다. 이전까지 회의는 하루2번 전화로 이뤄졌으며 결정과정은 공개되지않고 결정된 금가격만 공지됐다.

1922 국제연맹은 금이외 달러와 파운드로도 교환이 가능한 금환본위제를 결정했다. 1925 영국은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미연준은 금리를 내려 미국의 금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프랑스는 상황이 좋지않았다. 프랑스는 금본위제로 전환하기 위해 1928 파운드를 매각해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영국은 프랑스에 금태환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거부한다면 전쟁때 빌려준 채권을 회수하겠다고 위협했다. 프랑스는 파운드화매각을 중지했다. 미연준은 1927 유럽의 금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재할인율을 인하했다. 이과정에 미국의 금은 빠져나가고 주식시장은 과열됐다. 1929 미연준은 통화긴축정책을 실시했고 10.28뉴욕증시가 23% 급락하면서 1929대공황이 시작됐다. 대공황의 여파속에 당선된 프랭클린루즈벨트는 당선첫시기 은행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한다. 루즈벨트는1933.3.5~15 은행휴업조치를 취하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는 글래스스티걸법을 제정했다.

1920년대 유럽은 독일배상금처리의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1차세계대전으로 미국에 채무를 지고있었다. 독일은 엄청난 금액의 배상금을 지고있었고 전후 독일은 재력이 없었다. 미의회는 1924 도스안(Dawes Plan)과 1929 영안(Young Plan)이 작성돼 1930 시행됐다. 배상총액은 경감하고 상한기한을 두고 이자를 받는식이었다. 독일인들의 반대여론은 높아졌다. 나치는 영안반대운동으로인기를 얻고 집권했다. 1930 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국제결제은행)는 1차세계대전후 독일의 배상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스위스바젤에 주요당사국의 공동출자로 설립됐다. 설립당시 원탁회의의장은 JP모건의 퍼스트내셔널은행총재 잭레이놀즈였다. 독일이 유럽각국에 배상금을 지불할수 있게 미국의 은행이 자금을 융통해주고 영국·프랑스등은 채무를 상환받아 미국에 채무를 갚는식이었다. BIS는 금괴로 모든것을 결제하며 완전한 치외법권을 가지고 어떤 사법권도 BIS
에 개입할수 없도록 규정한 국제금융기구다. BIS는 이후로도 각국중앙은행의 금거래를 보장할것으로 예견됐다. 1988 바젤합의에서 자기자본비율규제를 정했고 남코리아도 1993 가입했다. BIS권고에는 은행이 위험자산을 상대로 삼아 최소8%이상의 자기자본을 유지하도록 돼있다. 1997외환위기당시 BIS비율8%가 은행퇴출의기준이 됐다.

2차대전의 종전을 앞둔 1944 미국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국제통화금융회의를 가지고 달러를 기준통화로 하는 국제통화제도를 만들어냈다. 2차대전과정에 미국에 금이 유입되면서 미국이 세계에 유통되는 금의 70%를 보유했다. 전쟁비용을 대면서 채권국이 된 힘을 이용해 미달러가 금태환이 가능한 기준통화로 됐다. 금융자본집단은 미달러를 기준통화로 정하면서 사실상 세계화폐를 쥐게 됐다. 이를 보장하는 기관으로 IMF(국제통화기금)와 WB(세계은행)·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수립을 합의했다. 마샬계획과 코리아전쟁·베트남전쟁이 이어지면서 대규모자금이 들어가고 미국의 금보유량이 계속 감소됐다. 1967 IMF회의에서 SDR(특별인출권, Special Drawing Rights)에 대한 안이 통과돼 가맹국은 1969까지 자국의 비준절차를 받도록 결정했다. 1971.8 미달러의 금태환중지선언이 있으면서 1974 세계무역비중 1%이상상위16개주요나라들의 통화가치를 가중평균해 산출하는 바스켓방식을 도입했다. 1976 자메이카 킹스톤에서 IMF회원국은 변동환율제와 고정환율제중자유롭게 환율제도를 선택할수 있다고 하면서 달러와 금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계산이 복잡하고 변동성이 확대돼 1981 미·독·일·영·프 5개국으로 축소했으며 2001 유로가 등장하면서 미달러·유로·일본엔·영국파운드 4개의 통화로 있다가 2016 중국위안화가 포함됐다

은행자본 더하기 산업자본, 금융자본으로

로스차일드가는 1814 영국동인도회사의 인도무역독점권이 폐지되자 그이권을 장악했다. 본래 동인도회사는 17세기초 상업자본의 집중형태로 등장했다. 상인들, 특히 유대인상인들은 스페인왕국의 종교적박해를 피해 당시 종교적자유가 보장된 네덜란드로 모였다. 그들은 동인도와의 직접무역을 위해서 1594 암스테르담에 회사를 설립했다. 1600 암스테르담·홀란트·젤란트등 동인도회사가 난립했다. 1602 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통합이 필요했고 의회의 요구에 따라 1602 하나로 통합됐다. 이는 최초의 주식회사이기도 했다. 이회사는 일본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동인도회사는 원주민에게 봉건적공납·약탈적매상을 했으며 일부지역에는 노예재배제를 실시했다. 이를 위해 정치군사적권력의 대행기관이 돼 현지에서 전제적정치를 시행했다. 영국에서도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에 영향을 받아 1600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해양제국으로 부상한 영국의 압박이 가중되고 식민지정책이 파탄나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식민지지배권을 정부에 양도하고 1800 해산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동인도무역의 독점권을 가졌고 개별기업에서 합자기업으로 전환해 영속성을 가지게 되면서 근대적주식회사로 변모했다. 그러나 회사의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돼 인도의 행정은 점차 영국의회의 감독하에 들어갔으며 1858 세포이항쟁을 계기로 인도의 통치기능을 모두 영국왕실에 넘기고 회사는 해산했다. 1814 인도무역독점권이 폐지됐고 1833중국무역독점권도 폐지됐다. 산업혁명과 함께 산업자본이 확립되면서 상업자본의 집중형태였던 무역기능의 동인도회사도 그힘을 잃었다.

18세기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보다 큰 규모의 자본이 산업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네이선은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영국철도가 놓이는것을 지켜봤으나 투자시기를 놓쳤다. 대신 이에 대한 정보를 오스트리아의 솔로몬 로스차일드에게 알려줬다. 솔로몬은 신중하게 준비했다. 솔로몬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의 채권을 팔아줬으며 재상 메테르니히와도 친분을 가지고있었다. 솔로몬은 빈에서 보스니아까지 100km에 걸친 유럽대륙의 최대규모철도건설사업을 신청했고 충분한 사전교섭으로 쉽게 사업권을 얻었다. 그러나 여론은 좋지않았다. 철도부설사업이 공표됐을때 사람들은 철도를 <악마의강철기계>라며 두려워했고 <유대인의음모>라며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식까지 결합됐다. 솔로몬은 철도건설자금을 모으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고 그중 2/3는 로스차일드가에서 보유하고 1/3을 선착순으로 모집했다. 이렇게 되고보니 많은 금융업자들이 주식매입에 몰려들었다. 거기에는 투자를 부추기는 솔로몬의 바람잡이들도 있었다. 로스차일드가의 수익을 보장해주면서 이렇게 <황제북방철도>가 놓여졌다. 로스차일드오스트리아가는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이후 재산을 몰수당했다. 1990년대 오스트리아정부로부터 돌려받은 미술품의 가치만 1억달러이상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제임스도 영국물건을 밀수해 팔아 수익을 봤다. 1836 네이선이 세상을 떠나자 제임스가 그뒤를 이었다. 1830~40년대 프랑스왕 루이필리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자산규모는 전체 다른프랑스은행들의 자산총합보다도 액수가 컸다. 제임스도 오스트리아의 경험을 참고해 프랑스에서 철도사업을 추진했고 3개노선을 완공시켰다. 이철도건설이 프랑스철도의 모태
가 돼 현재까지 내려온다. 제임스는 세실로즈를 통해 남아공의 금·다이아몬드사업에 진출했으며 1888 최대다이아몬드신디케이트 드비어스사창설에 투자했다. 1889 미얀마의 루비광산에도 투자했다.

1870년대 시작된 장기공황으로 카르텔이 광범하게 등장했으나 일시적이고 예외적이었다. 19세기말 일시적인 호황기를 거쳐 1900~03 다시 공황에 빠졌고 자본의 집적·집중으로 독점자본이 형성돼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로 전화됐다. 은행·산업의 이해관계가 유착되면서 금융자본이 발생한다. 독점전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을 기본으로 하지만 독점자본주의는 독점을 기본으로 경제활동이 이뤄진다. 독점의 지배는 불가피하게 금융과두정치의 지배로 나아가게 된다. 18~19세기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은 19세기 미국·독일로 이어졌다. 산업은 점차 대규모의 자본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면서 19세기말~20세기초 거대금융자본으로 집적·집중됐다.

1838 미국인 조지피바디가 런던에서 설립한 투자은행을 이어받은 JP모건사는 철도업계(대륙횡단철도) 밴더빌트(1794~1877), 철강업계(US스틸) 카네기(1835~1919), 전기전자업계(GE) 에디슨(1847~1931), 자동차업계(GM) 포드(1863~1947), 화학업계(듀폰)등 미국의 산업을 이끈 기업들에 자금을 지원, 그설립을 주도했거나 주거래은행이었다. JP모건은 원래 남북전쟁당시에도 군수산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1차세계대전때도 영국·프랑스정부를 대신해 전시자금조달과 무기매입대리인으로 지정됐다. 연합국무기만 30억달러어치를 팔았고 전시공채를 팔아 연합국에 대출해준 자금만 10억달러이상이었다. 2차대전에서도 JP모건은 미국정부의 전쟁비용조달을 위한 전시공채의 절반이상을 판매하면서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다.

로스차일드가는 미정유업계를 장악하고있던 존데이비슨록펠러 (1839~1937)를 통해 세계석유산업을 통제했다. 러시아의 바크유전이권을 취득했으며 유럽석유회사 로열더치셀에도 투자했다. 석유는 산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원이다. 자본주의상품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석유와 연결돼있지않은것이 없다. 록펠러는 석유가안정을 위해 독점을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록펠러는 로스차일드의 지원을 요청했고 그독점적지위를 담보로 제시했다. 록펠러는 1875 미국전체정유능력의 95%를 장악해 독점을 완성했다. 1882 스탠다드오일트러스트를 설립하는 한편 록펠러앤컴퍼니라는 자산운용사를 세웠다. 스탠다드오일트러스트는 모두 40개의 새끼회사를 거느리고있었으며 그 중 14개기업은 독점적으로 시장을 지배하고있었다. 미연방정부는 스탠다드오일에 대한 독점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1911 34개회사로 분할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세계석유업은 여전히 스탠다드오일에서 분할된 업체들과 영국·프랑스등의 석유업체들에 의해 <세븐시스터즈>라는 독점체계가 수립됐다.

금융독점자본은 1970년대 석유를 화폐와 연계시킨다. 사회주의권에 맞선 경기부양책 마샬계획의 추진과 계속된 식민지민족해방세력·사회주의세력과의 전쟁(중국내전지원·코리아전쟁·베트남전쟁등)으로 미국의 금유출이 계속되고 더이상 금환본위제를 유지할수 없게 됐다. 1971 미국은 브레튼우즈에서 약속했던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한다고 공식발표했다. 1973 헨리키신저는 제1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측과 협상을 벌여 미국의 군사·정치적지원을 약속하고 석유결제에 미달러만 사용한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를 계기로 <석유달러>가 형성됐고 이는 미국외지역으로는 거의 대부분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미국밖의 은행, 주로 유럽나라들의 은행에 예금된 달러를 <유럽달러>라고 한다. 이는 일반예금자금과 달리 한나라의 자금도 아니며 그어느나라의 금융·통화법에도 종속되지않는다. <유럽달러>는 완전히 독자적인 금융체계를 가지고 자본주의세계에서 단기대부자본으로 이용되고있다. 미국의 달러살포정책에 따라 뿌려진 달러는 <유럽달러>로 방대하게 형성돼 금융자본집단의 투기적목적에 활용된다. <유럽달러>는 가장 유동성이 높은 국제단기대부자본이다.

투기와 거품을 부르는 금융자본

거품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것은 1720 남해회사사건에서다. 1637 튤립파동(네덜란드)이 최초의 투기사건으로 알려졌다. 튤립파동과 남해거 품사건(영국), 1721 미시시피계획(프랑스)까지 근대유럽의 3대거품사건으로 유명하다. 영국에서는 정부의 재정상황이 심각해지자 부실채권등을 정리하기 위해 1711 남해회사를 설립했다. 남해회사는 남해무역, 스페인과의 협상을 통해 얻은 아프리카·스페인·서인도간의 노예무역사업을 할 계획이었으나 1718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사업이 잘 되지않았고 1718 복권채권이 의외의 성공을 거두면서 주식발행권한을 얻어내 이를 통한 투기조장으로 이익을 취했다. 남해회사거품사건으로 영국은 주식회사에 대한 법적제재조치를 취하지않을수 없었고 이때문에 영국의 주식회사발전이 1 세기는 늦어졌다는 비판이 있다. 주식회사는 자금의 집중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자본주의역사는 주식회사의 발전의 역사이기도 했다. 2차세계대전이후 이는 현대적인 기법으로 발전되고 일반화됐다. 통제주에서도 보듯이 주식을 가진 모든 사람이 기업의 주인으로 되는것이 아니며 이것이 기업의 민주주의운영을 의미하는것도 아니다. 재벌가가 금융적방법으로 기업전체를 지배하는 <효과적>방법으로 발전했다.

석유업계의 독점으로 지목받아 기업이 해체당한 록펠러가는 이후 재단을 운영하는 한편 자산운용사등 금융적지배의 한세력으로 등장했다. 2대 록펠러주니어는 뉴욕에퀴터블신탁회사(the Equitable Trust Company of New York)의 최대주주였고 1930 체이스은행이 에퀴터블신탁회사를 인수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큰 은행이 됐으며 한동안은 세계에서도 가장 큰 은행이었다. 1955 체이스은행과 맨하튼은행이 합병해 체이스맨하튼은행이 등장했으며 록펠러가가 이은행의 최대주주로 됐다. 다섯째아들 데이비드록펠러(1915~2017)는 1946 체이스맨하튼은행에 입사, 1969~81체이스맨하튼은행회장과 CEO를 역임했다. 1949~85 미국의 외교관계위원회(CFR)의 이사로, 1970~85 그회장을 역임했다. 데이비드는 1954 첫빌더버그모임에 참석했으며 1973 이후 백악관국가안보보좌관이 된 즈비그뉴브레진스키와3각위원회를 창설한것으로도 유명하다. 1996 케미컬은행이 체이스맨하튼을 인수했으나 이름은 체이스맨하튼을 계속 사용했다. 2000 체이스맨하튼이 JP모건을 인수해 JP모건체이스(J.P.Morgan Chase & Co.)가 탄생했다. JP모건체이스는 1996이전 케미컬의 주가기록을 보전하고있고 본사건물은 옛케미컬의 본사건물을 쓰고있다. 케미컬은행은 1824 설립이후 1961 매뉴팩처러스하노버를 인수하고 JP모건체이스가 된 이후에도 2004 뱅크원, 2008 베어스턴스·워싱턴뮤추얼등을 인수해 오늘의 JP모건체이스라는 거대금융회사를 만들었다.

원래 미국의 금융계를 대표하는 기업은 JP모건이라 할수 있다. 1933 루즈벨트가 대공황을 수습하기 위해 금융개혁으로 은행법(글래스스티걸법)을 제정하고 상업은행·투자은행을 분리하는 수술의 칼을 들이댄 대표적기업이 JP모건이다. JP모건은 여수신업무만 하는 상업은행으로 남고 증권및투자업무는 모건스탠리에 이관해 분사했다. 여타상업은행이 예금대출마진을 수익원으로 하는것과 달리 JP모건은 대기업및은행에대한대출·증권발행주선·외환거래·금융상품거래업무에서 수익을 얻었다. 대공황은 록펠러·모건그룹에 자산을 더욱 집중하는 효과를 낳았다. 당시 JP모건의 자회사들은 은행14개와 GE·US스틸·GM·보험회사등 미국상장기업자산총액의 40%를 차지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글래스스티걸법의 규제가 서서히 완화돼갔다. 1986 연준은 JP모건을 포함한 주요은행지주사가 상업어음·모기지담보증권·지방자치채권·소비자채권·해당채권을바탕으로한증권을 다룰수있도록 인가했다. 1999 은행은 중개업과 투자은행 인수가 허용됐다.

JP모건은 1998 남코리아의 IMF경제위기당시에도 남정부와 국영기업이 발행한 국공채판매주간사를 맡았다. 1997봄 JP모건은 남코리아에 바트화연계파생상품TRS(Total Return Swap)를 판매한다. JP모건은 SK증권의 300억원을 끌어들이고 500억원의 투자금을 조성해 SK증권에 스왑형태로 대출해주면서 SK증권이 총800억원을 투자하게 한다. 남코리아금융기관들은 JP모건의 이름과 수수료명목으로 받는 3%의 수익을 보고 이투자에 참여했다. 그해 7월 태국의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남코리아금융기관들이 JP모건에 지불해야할 손실액이 6~7조원에 달하게됐다. 300억원을 투자한 SK증권만 하더라도 손실액이 3000억원에 달했다. 당시 이거래와 관련된 7개기업·3대보증은행중 9개가 공중분해되거나 매각·합병됐다. 당시 바트화폭락을 유발한것은 JP모건·씨티은행·골드만삭스·조지소로스등이 벌인 환투기였다. 1998.2 뉴욕과 서울에서 진행된 9개소송에서 남코리아기업들은 신인도하락과 퇴출압력을 견디지못해 JP모건과 합의했다. 합의조건은 비밀에 부쳐졌다. 대한생명만 당시 소송을 계속 진행해 1심소송에서 미국연방법원으로부터 JP모건의 계약위반을 인정받아 손실금의 일부인 2600만달러반환판결을 받았다. 이는 국제파생상품거래관련분쟁 역사상 피해자가 승소한 최초의 사건이다.

2008 금융위기는 2007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금융공황이었다. 미국에서 한때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메릴린치에 이어 4번째로 큰 투자은행이었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금융세계공황이 폭발했다. 리먼브라더스는 1850 독일계유대인상인 헨리리먼과 그의 형제들에 의해 설립돼 증권·채권판매등으로 성장했고 1977에는 1867 설립된 다국적투자은행 쿤롭(Kuhn, Loeb & Co.)을 합병했다. 2008.9.15 6000억달러에 이르는 부채를 감당하지못해 파산신청을 하고 영국에 본사를 둔 바클리즈(Barclays)와 일본의 노무라홀딩스에 분할인수되면서 해체됐다.

2008 금융위기이후 수천가지의 금융규제가 시행됐다. 미국에서는 도드프랭크법안이 시행됐다. 리스크에 대비해 자본확충을 하라는것이 골자다. 오바마정부기간 이법안의 시행으로 은행들은 체질개선을 이뤘다는 분석이다. 비용절감·인원감축·기술투자를 통해 은행들의 비용이 사상최저에 이르렀다는것이다. 2016 JP모건은 디 지털모바일비지니스구축·핀테크제휴·머신러닝·AI등의 기술분야에 95억달러이상을 투자했다. 이런 상황에서 2016 대선에서 규제완화정책기조를 내세우는 도널드트럼프가 당선됐고 은행들의 시가총액이 일제히 상승했다. 골드만삭스는 2008금융위 기이전의 주가를 회복했다. 2018개정안은 엄격한 규제의 대상이 되는 은행의 기준을 기존 자산500억달러이상에서 2500억 달러이상으로 상향조정했고 규제완화대상이 된 은행들은 연방 준비제도이사회의 재무건전성평가를 받지않으며 나아가 자산이 100억달러미만인 금융기관은 <자기자본거래>금지조치의 대 상에 포함되지않는다. 당시 개정안으로 20개이상의 금융기관이 이같은 규제완화혜택을 누릴것으로 전망됐다. 2019.10 미연준은 볼커룰개정안을 최종승인했다. 볼커룰은 은행이 고수익을 쫓아 파생상품·헤지펀드등에 투자하는 자기자본거래의 금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있다. 핵심은 60일이내 단기거래를 자기자 본거래로 간주한다는 규정을 폐지한것이다. 영국파이낸셜타임스는 <볼커룰완화는트럼프미행정부가추진하고있는금융규제완화의가장중요한단계>라고 평가했다. 트럼프는 2020.5 코비드19위기속에 <경제회복을가로막는불필요한규제를없애라>며 규제완화행정명령에 서명하고 <바이러스에대응해일시중지한수백개규제를가급적영구중지하라>고 연방정부기관에 지시했다. 트럼프는 <바이러스때문에수백만명의미국인이일자리를잃은만큼일자리를파괴하는부담을제거하는게그어느때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간 트럼프와 대척점에 서서 통화긴축기조를 유지했던 현미연준의장 제롬파월은 2019바이러스세계공황을 계기로 2008양적완화를 넘어서는 <질적완화>까지 하면서 통화팽창정책을 실시하는데 앞장서고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화폐유 통법칙에 맞지않지만 국경봉쇄등 전세계적범위의 경제활동정지사태로 어쩔수 없는것으로 받아들여지고있는 상황이 되고있다. 남코리아의 개미투자자들에게서 보듯이 경기부양책속에 투자처를 찾지못한 자본은 투기에 몰리고있다.

금융자본집단의 세계지배전략

1855~65 영국총리를 역임한 파머스턴에게 영국의 당시 대표적인 은행가 베어링이 있었다면 1860년대후반에서 1890년대중반까지 교대로 영국총리를 지낸 자유당의 윌리엄이워트글래드스턴과 보수당의 벤저민디즈레일리에게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유대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총리가 된 디즈레일리는 라이오넬로스차일드와 친교를 맺고있었다.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은 스코틀랜드출신으로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와는 경쟁관계였다. 1875 디즈레일리내각이 로스차일드로부터 400만파운드를 받아 이집트운하를 매입하자 글래드스턴은 의회의 동의를 받지않았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한편 1885 나다니엘로스차일드는 글래드스턴총리의 제안과 도움으로 귀족작위를 받고 상원의원이 될수 있었다. 라이오넬과 나다니엘은 자유당소속 하원의원이었으나 디즈레일리와는 유대인이라 는 공통점이 있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유무역을 강요하고 영국의 이권극대화에 전력해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하는 영러패권전쟁을 이끌고 이집트점령·줄루전쟁등 아프리카진출에 앞장선 <제국주의자>로 알려졌다.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여왕이 인도황제의 직위를 갖게 하고 국정에 복귀시켜 영국의 상징으로서 왕실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1917 영국외교부장관 아서밸푸어는 월터로스차일드에게 팔레스타인지역에 <유대인국가>건설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유대인국가>건설에서 2 차세계대전의 나치의 등장과 유대인강제이주는 특기할 의미를 가졌다. 1933.1 총리가 된 히틀러는 이해 3.23 수권법을 통과시키고 나치지배체제를 수립한다. 같은해 8월 나치독일과 독일시온주의연맹, 앵글로팔레스타인은행 3자는 <이전협정(Haavara(transfer) Agreement)>을 체결한다. 협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재산을 양도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대신 독일물품을 판매하고 받은 대금을 팔레스타인은행이 현지통화로 이민자들에게 지급하는것이었다. 1938.3 독일 은 오스트리아에 군대를 끌고 들어가 병합한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에게도 재산을 몰수한다는 명령이 내려졌고 많은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났다. 그중에는 오스트리아의 로스차일드가문도 있었다. 그들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다시 돌아가지않았다. 1938.9 뮌헨협정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테란트합병을 동의하고 이어 1938.10 독일은 폴란드계와 무국적유 대인들을 폴란드로 대거 추방시킨다. 1939.9 나치독일의 폴란드침공으로 2차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유대인학살은 대부분 소련에 대한 침공이 시작된 1941.6이후 소련과의 접경지역에서 <모든유대인은게릴라로간주한다>는 미명하에 저질러 졌다. 유대인학살이 이른바<최종해결책>으로 구체화된것은 1942.1 독일 반제에서 있었던 나치독일차관급회의에서였다. 이전까지 특히 전쟁전까지 나치독일 이 점령지에서 유대인에게 취한 조치는 주로는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강제이주·퇴거시키는것이었다. 2차세계대전당시 빅터로스차일드는 영국정보부5과(MI5)에 근무했다. 그는 캠브리지대학동창 앤써니블런트와의 인연등으로 인해 소련에 핵정보를 넘겨주고 1948 이스라엘건국에 대한 지지를 끌어냈다는 의혹을 받고있다. 팔레스타인지역을 점령해온 당사자인 영국은 오히려 당시 표결에 기권했다. 상식적으로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반대할만한 이유가 분명했는데도 이를 반대하지않았다. 1949 소련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원자탄개발에 성공했다.

1950 영국은 중국의 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미국은 1979.1.1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정식수교했다. 중국은 대만과 국교를 맺은 나라와 는 수교하지않는다는 원칙을 갖고있다. 영국은 대만과 거리를 두고 중국을 선택했던것이다. 중국은 1980년대 일국양제의 원칙을 확립하고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홍콩반환과정과 포르투갈과의 마카오반환협정과정에서도 확인됐다. 영국은 1985 중국과 홍콩반환협정을 갖고 50년간 일국양제를 시행할것을 합의하고 1997.7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했다. 영국은 중국이 주도하는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도 참여했다. 2019 홍콩의 반중시위가 격화됐고 2020 영국은 트럼프미행정부의 반중국경제정책에 호응하고있다. 2020.10 중국공산당19기5중전회에서 총서기인 시진핑주석은 기술확보·내수확대를 통한 자립경제를 표방했다. 중국은 금융사외국인투자한도를 없애는등의 금융시장전면개방안을 추진해왔다. 2020.9.9 영국경제지<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중국이 금융시장규제를 완화하면서 펀드업계의 블랙록·뱅가드와 투자은행시티그룹·JP모건체이스가 최근 중국사업을 확장하고있다고 전했다. 뱅가드는 현재 홍콩에 있는 아시아지역본부를 중국 상하이로 이전하기로 했다고 8.26 발표했다. 뱅가드는 <홍콩내주요고객은우리가주력하는대상인일반투자자가아니라기관투자자>라며 <이제아시아에서초점은중국본토>라고 밝혔다. 시티은행은 9.2 미국은행으로는 처음으로 중국내 펀드수탁업무사업허가를 받았고 JP모건체이스는 51%의 지분을 갖고있는 뮤추얼펀드업체 <중국국제펀드매니지먼트>의 나머지지분 49%를 70억위안에 상하이푸동개발은행으로부터 인수하기로 했다. 한원시우중국공산당중앙위금융경제위부국장은 10.30 5중전회결과발표기자회견에서 <중국과미국경제가완전히분리되는건현실적이지않다>며 <분리보다협력하고싶은분야가더많다>고 말했다. 리커창총리도 <쌍순환정책의본질이내수진작에있지만폐쇄적인성격은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중국은행은 2015 영국의 런던금가격지수결정에 참가하는 은행으로 선정됐으며 2016 중국위안화가 IMF SDR통화바스켓에 포함됐다.

특히, 중국은 디지털화폐에서 속도를 내고있다. 중국인민은행이 광둥성선전시정부와 협력해 10.12 시민5만명에게 200위안씩 디지털위안화를 지급했고 일주일간 3389개 상점에서 6만2788건이 결제, 디지털화폐사용을 개시했다. 제롬파월미연준의장은 10.19 IMF연차총회에서 처음하는것보다 제대로 하는게 더 중요하다며 아직 CBDC(중앙은행디지털화폐)발행을 결정하지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10.27 JP모건측은 자체개발한 디지털화폐를 처음으로 상용화해 해외송금용도로 JPM코인을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JPM코인은 가격변동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달러·유로등 기존화폐나 안전자산에 가격이 연동되도록 설계한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설명이다. JP모건은 디지털화폐의 시장가치가 클것으로 판단해 블록체인·디지털화폐를 전담할 사업부 오닉스(Onyx)도 신설했다. BIS는 돈의 흐름이 투명해지고 발행량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기도 쉽다는 이유로 현금보다 CBDC가 유용하다며 권장하고있다.

금융자본집단은 정계·재계·학계·문화계의 전문가·예술가등 사회각분야의 영향력있는 주요인사들과 긴밀히 연결돼있다. 이들은 우선 매스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2020미대선에서 미언론들이 일방적으로 민주당편에 서서 트럼프대통령을 집요하게 공격해 트럼프대통령의 지지자들을 더욱 결속시키고있는 양상이다. 또 왕립국제문제연구소(영국 1920), 외교관계협의회(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미국 1921)등은 정치·경제의 학계·전문가집단을 구성하고있다. 1954 빌더버그회의(Bilderberg Conference)는 네덜란드의 베른하르트왕자에 의해 설립돼 빌더버그호텔에서 첫모임을 가졌다. 이모임은 영국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지휘를 받아 영국정보부6과(MI6)에서 만든것이라고 영국정보부관리를 지낸 존콜몬이 증언했다.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회의에서 유로화의 사용이나 닉슨의 대중국외교정책에 대한것들이 논의됐다고 한다. 로스차일드가와 미국등의 주요정치인들이 이행사에 참석하는 모습이 언론에 종종 공개된다. 1973 3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는 데이비드록펠러와 즈비그뉴브레진스키에 의해 창설됐다고 알려졌다. 3각이란 미국·유럽·일본을 뜻하는것이며 빌더버그회의·CFR이 설립을 지원했고 록펠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뉴욕·파리·도쿄에 본부를 두고있다. 3각위원회는 세계적규모의 경제권력을 창출하자는데 목적을 두고있다. 핵심성원인 브레진스키는 세계단일정부수립안을 제시하고 1976 카터대통령의 국가안보담당보좌관으로 활동했다. 카터대통령은 3각위원회 북미지부회장 폴볼커를 미연준의장으로 임명했다. 이기관들은 정계·재계·학계·언론계를 두루 아우르면서 거대한 엘리트집단을 이루고있어 이렇게 형성된 인맥에 의해 정치·경제활동이 이뤄지며 세대를 이어져 내려오고있다. 일명 다보스포럼이라고 하는 세계경제포럼 (World Economic Forum)은 1971 시작됐다. 매년 경제인들이 모여 경제계의 주요이슈를 다룬다. 2016 다보스포럼을 대표하는 슈밥은 이자리에서 <4차산업혁명>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로스차일드가는 특히 정보를 중시해왔다. 언론을 비롯한 이런 전문가집단은 정보를 창조하기도 하고 세계각국의 여러정보가 모이는 공간이 되기도 하며 이런자리를 통해 심지어 정보를 조작할수도 있다. 정보는 실제 경제적이익과 밀접히 연관되며 금융자본집단의 이해관계에 맞물리게 된다. 예를 들어 1970년대부터 점차 부각된 기후문제나 2020 갑자기 제기된 바이러스·세균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에너지·환경산업과 정보·나노·생물등 첨단과학분야의 발전을 촉진하고 이분야들에 대한 투자가능성을 높여준다. 끊임없이 새로운 투자처를 필요로 하는 금융자본집단은 민중의 기본적인 자주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위한것보다 수익성높은 신산업을 기대한다. 그런만큼 그에 맞는 새로운 산업분야를 개발하는데 집중하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그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마저 조장한다. 금융자본집단은 전쟁·공황·기후·세균(바이러스) 그리고 불확실성으로 공포를 확산시켜 자기가 쥔 정보를 무기로, 나아가 정보조작을 무기로 인류를 자기이익을 위한 노예로 만든다. 2019바이러스공황으로 달러의 세계화폐체계가 더욱 불안정해지는 동시에 SDR체계·유로화·디지털화폐기술등을 이용해 세계단일화폐를 만들어 장악하겠다는 금융자본집단의 계획이 촉진되고있다.

독점은 은행으로부터 생겼다. 은행도 소극적인 중개업으로부터 금융자본의 독점자로 전환하였다.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국가는 어느나라나 3~5개 정도의 최대급은행이 산업자본과 은행자본과의 <인적결합>을 실현하여 전국의 자본과 화폐소득의 대부분인 수십억의 돈에 대한 지배권을 그들 수중에 집중시켰다. 현대부르주아사회에서 예외없이 그물처럼 둘러쳐진 모든 경제기관과 정치기관의 종속관계에 있는 금융과두제, 이것이야말로 이런 독점의 가장 뚜렷한 현상이다.

(레닌 <자본주의의최고단계로서의제국주의>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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