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에 증권시장은 주로 국채중심의 투기장이었다. 1956.3.3 대한증권거래소출범과 함께 12개의 기업이 주식을 상장했다. 1962 증권거래법에 의해 대한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대한증권거래소주식에 대한 투기가 시작됐다. 남정부는 1968 기업공개등 발행시장을 육성하기 위해 한국투자공사를 설립하고 1969 자본시장육성의해로 정했다. 1969 청산거래제도를 폐기하고 공매도와 공매수를 금지했다. 1969.11 증권금융주식을 대상으로 다시한번 큰 파동이 일어났다. 1970 한국투자공사는 증권투자신탁이라는 최초의 펀드를 발행했다. 1960년대말 10만명선이던 투자자수 가 1970년대후반 100만명을 돌파했다. 1978~81 증시는 최악이었다. 장영자가 증권가의 큰손으로 등장해 건설주들의 폭등을 이끌었지만 장영자어음사기사건과 함께 폭락했다. 3저호황끝에 1989말 주가가 폭락하자 노태우정부는 증시부양조치로 한국은행이 증시가 안정될때까지 주식매입자금을 무제한 지원한다는 극단적인 대책안을 발표했다. 1992.1 국내상장주식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가 허용돼 1992 4.9%였던 외국인보유비중은 지난 2004 42%까지 올랐다가 2016말 31.9%를 기록했다. 1965 150억원이었던 시가총액은 2016.1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을 합쳐 1207조4580억원으로 확장됐다. 또하나의 자본시장은 부동산시장으로 형성됐다. 1997 외환위기이후 위축됐다가 다시 시작된 부양책으로 2000이후에는 서울지역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부동산가격이 폭등하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차츰 완화되다가 2008 금융세계공황의 영향으로 위축됐다가 2012 강남재건축붐으로 다시 부동산시장이 활기를 띠었다. 2020 코비드19 경기위축을 막기 위해 이뤄지는 자금공급이 그투자처를 찾아 증시·부동산시장이 등락을 거듭하고있다. 2000년대초반에는 IMF구조조정과정에 경기가 침체되자 정부는 내수진작을 위한 경기부양책을 진행했는데 그수단으로 등장한것이 신용카드를 활성화하는것이었다.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한도를 철폐하고 카드시장진입요건을 완화했다. 그결과 1997 143만명이었던 신용불량자가 IMF구조조정직후인 1998에도 193만명정도에 머물렀는데 2004.4말에는 382만4000명에 이르렀다. 유동화증권은 주로 기업부실채권이나 자동차채권이 주류를 이뤘는데 당시 이카드채가 유동화증권의 높은 순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신용회사들이 카드채에 대한 신용등급을 일제히 하향조정했다. 이는 카드사들이 도미노식부실을 일으킨 <카드사태>로 이어진다. 2008 미국발 금융세계공황의 계기가 된 2007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도 무분별한 부동산모기지론의 판매가 원인이었다. 증권·채권·펀드·부동산·금·암호화폐·외환·선물등 이런 금융활동은 부의 재분배과정이지만 없는 사람들에게 더큰몫이 돌아가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개인들이 가지고있는 유휴화폐자금을 끌어내 자본의 집적·집중을 실현하려는 목적이 본질이다. 결국 금융자본집단의 독점자본만을 강화할뿐이다. 자본주의경제는 심지어 카드빚·부동산대출등 없는돈까지 끌어내 투기를 조장한다.